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손음 시집 (걷는사람 시인선 38)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손음 시집



(걷는사람 시인선 38)


1부 죽음은 아름다운 꽃의 이름을 달고 다녔다
낙원빌라
아귀
거대한 밭
그 기차는 어디로 갔을까
밥 묵고 오끼예
꽃의 장난
달개비
만화경
살구나무 변소
지붕 위의 고양이 역
복도
비혼모
송정 블루스

2부 비는 중얼중얼 흘러내린다
미자 화분
공수 해변
목련사
맨드라미
동백 세월
고백
11월
창밖 목련
벽에 기대지 마시오
사과 한 상자

감자
통영 트렁크
해변 모텔

3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도 비를 맞는다
자갈치 밥집
서생 한 상자
담벼락
우체국 앞 평상
문학
저, 구두
밤의 정원
저녁의 신데렐라
자정
영도에 갔다
별이 빛나는 낮에
벚꽃 십 리
겨울 음화
거리에서
검은 밤 흰 해변

4부 기다리는 것도 직업이 될 수 있다면

임랑
몰래 예뻤던 목련
벚꽃나무 당신
수국

자귀꽃 저녁
아내의 식탁
쑥 캐는 남자
9월 1일
바닷가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편의점 생각
붉은 치마를 입은 소녀
사과와 트럭

해설
삶이 품고 있는 질문들
—남승원(문학평론가)





본명 순순미.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월간 《현대시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칸나의 저녁』과 연구서 『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를 펴냈으며, 제11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깡마른 손 하나가
채소밭 하나를 밀고 간다

(중략)

할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호미질을 한다
진저리 치는 만큼 잡초들은 자란다 전속력으로 자란다

상추와 호박과 고구마와 잡초와
열무와 고추와 잡초와 할머니가
서로가 서로를 저항하면서 자란다
이런 오살할!
욕이란 욕 다 얻어먹어 가며
비로소 여름은 완성되고 있다
─「거대한 밭」 부분

한적한 주택가에 슈퍼 하나가 있다 벚꽃나무 한 그루 남편처럼 서 있고 주인은 온데간데없다 ‘밥 묵고 오끼예’ 신문지 한 장 찢어 붙여 놓고 그녀는 꽃놀이라도 간 것일까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식사는 길어지고 있다

‘밥 묵고 오끼예’ 봄날의 나물 같은 사투리가 그녀의 부재를 메우고 있다 나는 사이다 한 병 사러 왔다가 진성슈퍼 아줌마 그녀를 상상한다 파마머리일까, 뚱뚱할까, 날씬할까, 테이블 위 초록 콜라병에 벚꽃가지 하나 척, 꽂아 두고 사라진 그녀가 나는 궁금하다

‘밥 묵고 오끼예’ 어쩌면 미나리 같은, 냉이 같은, 씀바귀 같은 대사 한마디 날리고 봄나들이를 선택한 그녀의 외출은 길어지고 있다 나는 봄날의 그림자처럼 길어지고 있는 그녀의 식사를 오래 생각한다
─「밥 묵고 오끼예」 전문

맨드라미 트럼펫이 길게 울려 퍼진다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마당에
발을 덴 수탉이 뒤뚱거리며 마당을 빠져나간다
식구들은 평상에 앉아서 더위를 구워 먹는다

맨드라미가 여름을 길게 분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맨드라미가
길게 울려 퍼진다

붉은 살점 같은 맨드라미 활짝 피었다
붉은 고기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들도 따라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끼리 욕을 한다 고기보다 붉은 욕을 고기 굽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욕을 만든다

자, 자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식구들이 기름진 입가를 엉엉 웃는다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그래 봤자, 그래 봤자다

모르는 척 고기가 익어 간다
맨드라미가 식구들을 길게 분다
─「맨드라미」 전문

비가 내린다 11월은 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상점 앞을 지나간다 내리는 비는 11월과 상관없이 11 11 불평하듯 내리다가 곧 사라졌다 나무들은 지가 낳기라도 한것처럼 11월의 뒤통수를 오래 쳐다본다 11월은 저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11 11 이 직선의 기호를 들여다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최선을 다해 살고 싶지 않아 내일은,
─「11월」 부분

감자를 삶는다 흐린 불빛 아래 감자를 먹는다 비가 내리고 누군가의 심장 같은 감자가 따뜻하다 일손을 놓고 휴식처럼 감자를 먹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빗소리를 들으며 젓가락으로 포크로 감자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저녁이다 어릴 적 친구 미자 같은 만만한 감자, 나는 주 감자를 먹는다 그때마다 비가 내렸다 냄비 속에 새알처럼 담겨진 감자는 순하고 말이 없다 비는 한 알 한 알 감자의 내부를 파고든다 내가 조용히 앓고 있던 슬픔이 저 혼자서 감자를 먹는다 감자는 나를 익히고 내리는 비를 가만히 듣는다 그때 내가 조금 미안했어 하며 감자를 삶는다 비는 감자를 익힌다 노란 냄비가 모락모락 익어 간다

저것은 감자가 아니다
─「감자」 전문

여관방 문을 여는데 수국이다 간밤 기억 속 탕탕, 총성이 저렇게 부풀려진 꽃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총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올망졸망 비좁은 화단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수국에게 누가 저 분홍을 바쳤나 누가 잉크를 쏟아부었나 여름의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수국 은 저 혼자 두근두근

어데로 갈까예? 저, 아무 데나 만 원어치만 달려 주세요. 택시는 한 마리 생선처럼 헤엄쳐서 대교 근처 여관 앞에다 트렁크를 내던져 버린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라 악마의 농담, 그때 검은 트렁크는 서른 부근

어디에도 은신처란 없는 것이다 어디를 떠나와도 마음이 따라다니니 소주 몇 잔에도 뱃고동 소리 간간하다 수국이 혼자 젖는다 아무래도 저 수국의 머리는 무게의 천형을 받았구나 나도 쪼그리고 앉았는데 어쩌나 내 머리에도 천 개의 수국이 무겁게 피었어

어디로 가야 할까 저항이든 혁명이든 이 순간을 건너가 보자 한철 아름다움의 명을 받아 무게의 천형을 머리에 이고 가는 저 수국처럼 나는 내가 가진 생의 무게를 건너가야 하리

뽀글뽀글 수국 파마를 한 여자가 여관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다 검은 트렁크는 열려 있다
─「통영 트렁크」 전문

낯선 사람끼리 쓸쓸함을 비벼 먹는다
비린내를 풍기며 기름내를 풍기며
어떠냐며 스스럼없이 마주 앉아 서로의 심장을 데운다
고등어자반이 사천 원이라는 것
누구나 추웠던 한때를 기억한다는 것
사람들은 연탄불 같은 주인 여자를 실컷 쬐고 가는 것이다
─「자갈치 밥집」 부분

편의점에는 편의한 생각이 있다 삼각김밥이 있고 19세 미만 술과 담배 금지가 있다 찐빵과 어묵이 있고 즉석 북엇국이 있고 즉석 미역국이 있다 로또복권이 있고 밤을 잊은 그대가 있고 아저씨 술 작작 드세요가 있다

편의점에서 한 살 더 먹는 소년이 있고 컵라면으로 슬픔을 때우는 인류가 있고 욕으로 김밥을 욱여넣는 이가 있다 배가 고파 달을 먹는 고양이가 있고 진열대 재고를 걱정하는 사장이 있다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없는 편의점의 날씨가 따로 있다

편의점으로 놀러 간다 화성에서 내려온 밤의 케이블카처럼 편의점이 환하게 빛난다 자다가 웃다가 울다가 온통 편의점으로 가득 찬 생각들이 밥 먹으러 간다 죽으러 간다 살러 간다 편의점의 삶이 계속된다
미치도록,
─「편의점 생각」 전문

“살냄새를 꺼뜨리지 않은” 입체적인 인물의 향연

걷는사람 시인선 38번 작품으로 손음(본명 손순미)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칸나의 저녁』으로 “존재의 무거움을 희석시키는 인정(人情)이 생생하게 살아 있”(김명인)음을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정밀하게 보여 주었던 그가 10여 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를 펴낸 것.

「시인의 말」에서 밝히듯, 시인은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고 여기며 그들의 통증을 받아쓴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는 단편영화처럼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고,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낙원빌라」 「밥 묵고 오끼예」 「만화경」 「비혼모」 「자갈치 밥집」 등의 시편을 비롯해 시집 전반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 속 주인공은 대개 여성이다. 채소를 키우는 할머니거나 슈퍼 아줌마거나 “불안 때문에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비혼모거나, 밥집을 운영하는 여인이다. 그들의 현실은 “깡마른 손 하나가/채소밭 하나를 밀고” 가듯 “서로가 서로를 저항하면서 자란다”.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어 가며”(「거대한 밭」) 살지만, 어느 날엔 “지상낙원에 낙원빌라가 저렇게 자라고 있다”(「낙원빌라」)는 걸 거짓말처럼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먹어도 먹어도 한평생 허기에 빠져” 사는 “아귀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낸 도마에/노을이 흥건한 저녁”(「아귀」)이 온다는 표현은 또 얼마나 절묘한가.

시인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이나 버려진 사물들과 대화를 한다. 마치 그것들이 하지 못한 말을 전하는 것처럼 목소리 높이지 않고 담담하게 침묵시위를 하듯 보여 준다. 「살구나무 변소」의 “살구 싶어, 살구 싶어/닭의 비명이 살구나무 검은 잎새를 흔들었다”, 「고백」의 “비는 중얼중얼 흘러내린다 (…) 시무룩한 평화가 찾아든다”, 「창밖 목련」의 “목련의 일이란 잠시 꽃의 행세만 하고 떠나가는 일/짧은 시간 동안 통점만 앓고 가는/꽃의 생애를 누가 기록해 줄 것인가/나는 묵묵히 목련을 걷는다”라는 표현에서도 보듯 위트와 풍자, 여러 변주를 통해 다양한 사물들에 깃든 의미를 부여한다. 거기에는 부조리한 인간 군상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손음은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를 통해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하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꽃의 장난」)한 이 아이러니한 삶이, 나나 타인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적시한다. 남승원 평론가가 표현한 대로 “일상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결국 시 쓰기로 이어지는 자신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물과 사람,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직관하는 시인의 감각적 예리함이 “살냄새를 꺼뜨리지 않”(이기인 시인)고 전해져 독자들을 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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