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한국인.

히틀러와 맞서 싸운 유일한 한국사람 - 김영옥 대령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이집트와 인도 서부까지 장악한 전무후무한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인데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군인이라 불리는 한국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현대시대의 전쟁은 보통 무기전쟁이라고 합니다. 전투기, 미사일, 전차, 로봇 등 인간의 힘으로 발휘할 수 없는 폭발력을 무기가 대신하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무기가 발달해도 전쟁의 기본요소는 군인입니다. 군인이 없이 전투기를 조종할 수 없고, 군인이 없이 전차를 몰 수 없고, 군인없이는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없으니까요. 현대전도 그럴진대 과거에는 군인의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나요? 프랑스의 제1대 총리이자 나폴레옹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샤를 모리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100마리 양의 부대가 한 마리의 양이 이끄는 100마리의 사자부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즉, 어떤 리더가 이끄느냐에 따라 온순한 양이 되느냐 포악한 짐승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미국 역사에 그 리더십으로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한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김영옥 대령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43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은 악마와 같았습니다. 전차사단을 이끌고 연합군을 포위해버렸습니다. 연합군이 위치한 ‘안지오’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위기에 놓여있었죠. 연합군은 어떻게든 독일군을 포로로 잡아 전차부대의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한국인이 나서서 뜻밖의 작전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직접 적진에 침투해 포로를 잡아오겠다는 자살행위와도 같은 제안이었습니다. 그날 밤 지뢰가 빽빽하게 설치된 지뢰지대에서 하나하나 손으로 지뢰를 제거해가며 독일군 벙커를 침입했고, 마침내 독일군 2명을 포로로 잡아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이들에게 얻은 정보는 연합군에게 전달됐고 마침내 ‘버팔로’라고 불리는 작전명 하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영옥은 도대체 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우고 있었을까요?



김영옥은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던 김순권의 아들입니다. 김순권은 미국 LA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도산 안창호와 함께 활동했으며 이승만과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하죠. 김순권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불세출의 세계전쟁영웅 김영옥이고, 또 한 명은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무대의상계의 전설로 불리는 ‘윌라 김’입니다. 김영옥이 21살 되던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미 육군에 사병으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군생활은 녹록치 않았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 미국은 아시아계, 특히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서는 자신들의 조국 '미국'에 충성심을 보이도록 강요했고 결국 전쟁에 강제로 참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영옥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육군 장교 후보생 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한 후 소위로 임관합니다. 졸업 후 그는 100대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죠. 이것은 미군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미 육군은 1개 연대에 3개 대대로 구성되어 1대대, 2대대, 3대대로 불립니다만 김영옥의 100대대는 소속 연대도 없는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본계의 스파이 행위를 감시하고자 그들을 연대도 없는 대대에 모두 편성시킨 것인데요. 이후 김영옥의 100대대는 2차대전에서 치열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그 전쟁에서 100대대는 미국인으로 정정당당하게 인정받기위해 격렬하게 전투에 임했습니다. 100대대 부대의 모토는 죽을 때까지 올인한다는 'go for broke'를 구호로 사용했고, 적공격에 의해 일정수준 이상의 부상을 입은 병사에서 수여하는 훈장인 '퍼플 하트 훈장'의 이름을 딴 '퍼플 하트 대대'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하게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일 앞에는 항상 김영옥이 있었죠.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항상 솔선수범했으며,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고, 지휘관으로 항상 큰 형처럼 병사들을 대했고 모든 부대원들은 그를 존경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던 그 시기에 말이죠.

어쨌든, 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그는 적진에서 포로 2명을 생포했고 그의 이 목숨을 건 도전 덕분에 로마를 해방시킨 버팔로 작전이 개시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부대원들의 훌륭한 지휘관이었지만 상명하복을 명령처럼 따랐습니다. 설사 부당한 작전명령이 떨어져도 절대 항명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 번은 프랑스의 ‘비퐁텐느’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 중 처음으로 고지대를 점령해 유리한 위치에 섰는데 사단장의 철수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독일군을 완벽히 격파할 계획을 세워두고 자신도 있었지만 사단장의 명령을 거부해야하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거역하게되면 사단장의 지위도 바닥에 떨어지고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을 걱정한 것이죠. 그렇게 어렵게 철수했는데 철수한 다음 날 아침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비퐁텐느’라는 아무 전략적 가치도 없는 작은 마을을 점령하라는 명령. 결국 최선을 다해 점령했지만 김영옥의 100대대는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면서 독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김영옥은 기관총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 분은 유럽에서 ‘카피텐느 김’, 즉 김대위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비퐁텐느 마을에는 김영옥이 기관총을 맞았던 자리에 성당이 들어섰는데 성당 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100대대 영웅 중 한 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당했으나 의무병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있으니 일개 병사였다면 이런 비석이 세워졌을까 싶습니다.

다음 영상에서 다룰 이야기지만 김영옥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는데요,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김영옥은 엄청난 양의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고, 프랑스는 십자무공훈장에 이어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수여했습니다. 미국 정부 역시 특별무공훈장 1개, 은성무공훈장 2개, 동성무공훈장을 2개를 수여해 그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한국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죠.

지난 2012년 msn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을 선정했는데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대통령,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 등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전쟁사의 영웅들 사이에 김영옥이 포함되었습니다. 전쟁영웅이란 단순히 전쟁에서 가장 용감했다거나 유능하다고 부여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현재를 있게 한 인물들에게 수여되는 칭호입니다. 비록 완벽한 한국인은 아니지만 완전한 한국피를 가진 한국인으로 세계가 영웅으로 기억해주고 있어 뿌듯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영옥이 한국전쟁에 참여해 이룬 업적 및 그의 여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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